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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풍 팔영루(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5호)
청풍부를 출입하는 관문이다. '남덕문'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처음 지은 시기는 알 수 없으나, 고종 7년(1870)에 세운 '팔영루사적비'에 의하면, 숙종 28년(1702)에 부사 이기홍이 중건하고 남덕문이라 한 것을, 고종 7년에 부사 이직현이 중수하고 사적비를 세웠다. 그 후 부사 민치상이 청풍팔경을 시제로 한 팔영시가 있어 팔영루라 부르게 되었다.

본래는 읍리 286번지의 청풍 북쪽에 있었으나, 1983년 충주댐 건설로 인하여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복원하였다.
2.2m의 석축 기단을 쌓고 그 중앙에 4각의 문을 내고, 문천장에는 호랑이 그림이 그려져 있다.

기단 위에 전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 지붕의 다락집을 세웠다.

 

 

 

수산 지곡리 고가(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89호)
본래 수산면 지곡리 웃말에 있던 민가주택으로 충주댐 건설로 1985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복원한 것이다.
집의 구조는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로 이루어져 있다.

안채는 ㄱ자형과 팔작 기와집이며, 사랑채와의 사이를 담장으로 경계를 이루고 사랑채로 연결하는 판문을 달아 출입하도록 꾸며져 있다. 사랑채와 행랑채는 ㅡ자형의 초가로 되어있다.

행랑채는 대문간 우측으로 외양간, 방앗간을 이루고 다락을 꾸미고 있다.

이 집의 행랑채의 구조 및 부엌의 배치 등은 지곡리 마을의 특징 있는 일반형이라고 할 수 있다.

 

 

 

새끼틀로 볏짚으로 새끼를 꼬는 기계이다.

 

 

 

청풍 석조여래입상(보물 제546호)
이 불상은 높이가 341cm이고, 전체적인 조각 양식으로 볼때 통일신라 말기(10세기경)의 작품으로 보인다.
불상의 얼굴 모양은 풍만하고 자비로운 상으로 두툼한 양볼에 인중(코와 입술 사이의 우묵한 곳)이 뚜렷하고 두 귀는 양어깨까지 드리워졌다. 목에는 삼도가 새겨져 있으며, 왼손은 땅을 가리키고 있다.

옷은 통견의(양어깨를 덮은 법의)를 걸치고 안에 속내의를 받쳐입고 있으며, 배에서 매듭을 지어 V자형으로 겹겹이 대좌에까지 내려왔다.

충주댐 건설로 수몰지인 청풍면 읍리에서 1983년 이곳으로 옮겨 복원했다.

 

 

 

김중명
청풍 김씨로 자는 이회, 과거에 급제한 후 성묘갔던 길에 묘 뒤에 숨어 있던 큰 범을 만나게 되었는데 따라온 사람들이 혼비백산하여 감히 앞으로 나가지 못하자 중명이 말에서 내려 고함을 크게 지르며 곧장 나아가 발로 그 놈을 차서 죽여 버리니 그 용맹에 탄복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고인돌과 성혈
선사시대 거석문화의 일종으로 지상이나 지하의 무덤방 위에 괴었던 거대한 돌로 이루어진 일종의 무덤양식이다.
본 고인돌군은 충주댐 건설로 인해 수몰된 청풍면 황석리 지역에서 옮겨온 남방식 고인돌로 특히, 중앙에 배치된 고인돌은 하늘의 별자리로 보이는 성혈이 새겨져 있어 특이하다.

이 성혈은 묻힌 사람의 영생불멸을 기원하여 새긴 것으로 보이며, 별자리의 위치로 보아 당시 4월~5월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눈이 고인돌위를 덮고 있어서 성혈을 확인할 수가 없어서 아쉬웠다^^;

 

 

 

석물군
수몰이전 옛 청풍, 수산·덕산·한수지역에 산재 되어온 고대 사회의 장의 풍속 무덤인 지석묘 5점과 문인석 6점 그리고 도호부시대 군수와 부사의 송덕비·공덕비·선정비 32점과 제천향교 경내에 보존하던 역대 관찰사·현감·군수의 치적·공적비 10점등 총 42점을 이곳에 배치하여 남한강변의 거석문화에 대한 변천과 당시 인물의 공적을 한눈에 알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청풍 한벽루(보물 제528호)
고려 충숙왕 4년(1317)에 청풍현이 군으로 승격되자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관아의 부속건물로

1972년 대홍수로 무너진 것을 1975년 원래의 양식으로 복원하였다.
이 루는 석축토탄의 자연석 주초석 위에 기둥이 배가 부른 엔타시스 수법을 쓴 층 아래 기둥을 세우고

마루를 설치하였으며, 정면 4칸 측면 3칸으로 팔작지붕에 주심포계 양식이다.

누의 우측에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된 계단식 익랑(대문간에 붙여 지은 방)을 달았다.

 

 

 

제천 청풍 응천각(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90호)
이 건물의 용도는 알 수 없으나, 본래 한벽루의 좌측에 나란히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
처음 세운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명종 초 이황이 단양군수로 있을 때 '응청각'이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인조 15년(1637)에 충청감사 정세규의 일기에 응청각에서 유숙한 기록이 있다.

고종 37년(1900)에 부사 현인복이 중수하였다.
본래 청풍면 읍리 203-1번지에 있었으나 충주댐의 건설로 1983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복원하였다.
2층 누각으로 아래층은 토석축의 담으로 벽을 막고, 그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집이다.

건물 좌측에 목조 계단을 만들어 2층으로 오르내리게 하였다.

 

 

 

아궁이

 

 

 

제천 청풍 금병헌(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4호)
청풍부의 청사로 쓰였던 동헌건물이다.

청풍은 삼국시대에 사열이현이었으나, 신라 경덕왕 때 청풍현이라 하였다.

고려 충숙왕 때 지군사가 되고, 조선 세조 때 군이 되었다.
현종 초에 도호부로 되었으며, 고종 32년에 군이 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의 통폐합에 따라 청풍면이 되었다.
이 건물은 숙종 7년(1681)에 부사 오도일이 처음 지었다. 그 후 숙종 31년(1705)에 부사 이희조가 중건하고, 영조 2년(1726)에 부사 박필문이 중수하고, 권돈인이 편액을 써서 걸었다.

고종 37년(1900)에 부사 현인복이 전면 보수하였다.
본래 청풍면 읍리 203-1번지에 있었으나, 충주댐의 건설로 인하여 1983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복원하였다.
정면 6칸, 측면 3칸의 팔작집이다. 일명 명월정이라고도 하며, 내부에는 '청풍관'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육각

 

 

 

배롱나무라.. 이름도 귀엽고 나무결도 매끈하다^^

 

 

 

인고의 세월을 이겨낸 노간주나무

 

 

 

연리지 나무

 

 

 

청풍 망월산성(충청북도 기념물 제93호)
옛 청풍소재지의 동남쪽에 위치한 망월산의 정상부를 둘러싼 작은 규모의 석축산성이다.

둘레는 500m이며, 높이는 가장 높은 곳이 약 4m이다.

 

 

 

문화재단지가 한눈에 내다 보인다.

 

 

 

S라인 벗나무라고.. ;;

 

 

 

망월

 

 

 

청풍호의 모습

 

 

 

이 바위는 적과 싸움에 앞서 하늘에 승리를 기원하는 제사를 올리던 곳이라고 한다.

 

 

 

하늘을 떠받친 손모양의 소나무

 

 

 

제천 청풍 금남루(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0호)
청풍부의 아문으로, '도호부절제아문'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순조 25년(1825)에 청풍부사 조길원이 처음 세우고 현판도 걸었다.

고종 7년(1870)에 부사 이직현이, 동 37년(1900)에 부사 현인복이 각각 중수하고 1956년에도 보수하였다.

본래 청풍면 읍리 203-1번지에 있었으나, 충주댐 조성으로 인하여 1983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복원하였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각집으로 팔각의 높은 돌기둥 위에 세운 2층의 다락집이다.

 

 

 

청풍 후산리 고가(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85호)
본래 청풍면 후산리 105번지에 있었던 민가로 충주댐 건설로 1985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복원한 것이다.
조선말기에 지어진 ㄱ자형의 팔작 기와집이다. 대청마루를 기준으로 하여 동남을 향하고 있다.

대청의 우측에 2칸 크기의 건너방과, 툇마루를 높이 하고 그 밑에 함실 아궁이를 두고 있다.

대청은 좌측으로 웃방이 있고 웃방에서 동쪽으로 꺾어 대청의 좌측으로 후퇴를 후보하여 제사방으로 꾸미고 있다. 전체적인 내부의 배치가 특이하다. 중부지방의 보편적인 민가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연기가 나오는 굴뚝정도일까?

 

 

 

연자방아로 둥근 돌판 위에 그보다 작고 둥근 돌을 옆으로 세워 얹어서 이를 마소가 돌려, 곡식을 찧거나 빻는 도구이다.

 

 

 

청풍 도화리 고가(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83호)
이 가옥은 본래 청풍면 도화리에 있었던 조선 말기의 목조기와집으로서 충주댐 건설로 수몰되게 되어 1985년에 이곳으로 이전 복원하였다.

건물은 경사진 대지를 이용하여 뒷면은 1단의 낮은 냇돌 기단을, 앞면은 5~6단의 높은 기단을 구성하여 세운 'ㄷ'자형의 집으로 왼쪽에는 방·부엌·광이 배치되고, 중앙에는 3칸 크기의 대청이, 오른쪽에는 방 2칸과 부엌이 배치되었다. 가구는 3량가구이며 벽은 부엌과 웃방 뒷벽을 제외하고 모두 심벽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 집은 본래 부엌 뒤뜰과 건물의 서쪽 부분에 각각 장독대를 두었고 뒤뜰과 옆 마당은 밭으로 사용되었으나 지금은 건물만 이전하여 예전의 자연환경은 찾을 수 없다.

 

 

 

톱이.. ㅋㅋ 무기다 -_-;

 

 

 

청풍 황석리 고가(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84호)
본래 청풍면 황석리에 있었던 조선 말기의 목조기와집으로 충주댐건설로 수몰되게 되어 1985년에 이곳으로 이전 복원하였다. 안채는 4칸 규모의 기와집으로 오른쪽 앞면에 툇간을 두었다.

정남향의 'ㅡ'자형 구조인데 왼쪽으로부터 부엌·안방·웃방을 나란히 배치하고 끝에 사랑방을 두었다.

안방과 웃방 앞에는 마루를 놓았다.
이 고가는 조선시대 시골의 양반가옥으로서 규모는 크지 않으나 구조형식과 건축공법이 특이한 건축물이다.

 

 

 

제천유물전시

 

 

 

새긴 사람얼굴이라고 하는데 -_-;; 하하하 그냥 웃지요!

 

 

 

수몰역사

 

 

 

청풍향교
옛날에 고을의 안산 남쪽 산기슭 중간에 고려 충숙왕때 창건하였으며, 조선 정조 3년(1779)에 부치에서 동북쪽의 격강 3리 교리 62번지로 이건하고, 고종 19년(1882)에 중수하였다.
1983년에 충주댐 수몰로 지금의 물태리 산 6번지 남향으로 신축 이건하였다.

 

 

 

?병과 함께!


 아! 팔작지붕? 팔작기와? 궁금해서 검색을 해봤습니다.^^ 한국의 고유지붕중에 하나라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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